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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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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r_artist 2012. 4. 1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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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숲에 많은 것을 의존하며 문명을 만들어왔다. 인류는 숲을 보존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지만, 여러 이유로 숲을 파괴하기도 했다. 숲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쳐왔다.




농업의 시작과 숲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내장산 백양사 쌍계루 주변의 아름다운 숲.
숲은 홍수를 조절하고 공기와 수질을 정화하는 기능 외에도 건강과 휴식을 위한 녹색 공간을 제공한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 인류는 숲 속에서 사냥과 채집 등으로 삶을 영위해왔다. 하지만 농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인류는 숲을 농경지로 바꾸며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숲이 농경지로 바뀌어갔지만, 농업사회에서 숲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숲이 훼손되면 목재와 땔감이 부족해지는 것은 물론, 물의 정상적인 순환을 어렵게 하여 홍수, 가뭄, 강의 범람 등으로 인해 농업생산에 타격을 주는 자연재해가 일어난다. 따라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숲을 보호해야만 한다.











화전의 확대와 숲의 파괴

인구가 증가하고 농지가 부족해지자 산의 나무를 태우고 곡식을 재배하는 화전이 크게 늘었다. 화전은 광복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1968년 화정정리법을 통해 법령으로 금지되었다.


17, 18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인구는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일본, 청과의 전쟁 이후, 조선에서는 농토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들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火田)을 일궈 새로 농지를 확보해 살 길을 마련했다. 정부에서도 새로운 경지 개간을 장려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산에는 새로운 밭(山田)이 크게 늘었는데, 정부에서는 화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우리나라의 산악이 국토의 3/4이므로 화전의 면적이 평지의 논밭과 비슷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화전 때문에 전국적으로 엄청난 숲이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1675년 조선정부가 화전을 금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지만,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화전은 수확이 평지의 밭(原田)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세금 또한 적게 냈기 때문에 농민들은 화전을 계속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화전을 일군 후 차츰 계속 농사를 짓는 숙전(熟田)이 되는 경우도 많아 산골에 들어가 농사짓는 농민들의 숫자는 늘어갔다. 게다가 산에 계단식 논(沓)까지 만들면서 숲은 더욱 파괴되었다.















숲의 황폐화와 농업생산성의 저하

천연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높이가 5-7m 정도되는 1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벽에 자라고 있으며, 측백나무 외에도 소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주변의 숲은 사람들이 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서 황폐해졌지만 측백나무는 절벽의 바위틈에 자라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1910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임야(林野) 가운데 어린 나무조차 없는 황폐한 지역의 비율이 무려 26%였다. 한반도 남부지역 ㏊당(當) 임목축적(林木蓄積)은 10㎥에 불과했다. 이는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과 경기, 남부지방 대부분의 산에 나무가 없음을 의미한다. 숲이 황폐화되면, 산의 흙과 모래가 계곡을 거쳐 하류로 운반되어 강폭이 넓어지고 강바닥이 높아지게 된다. 집중호우에 하천이 쉽게 범람하고 제방이 붕괴되며, 이는 곧 농경지에 피해를 준다. 또한 물의 저장과 공급을 조절하는 수리체계를 망가뜨리고, 산사태 등을 일으켜 농업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리게 된다. 결국 농업생산성의 저하는 농민의 생활을 어렵게 했다. 또한 농산물의 가격을 올려 도시인의 생활도 어렵게 했다. 이러한 경제적 파탄은 19세기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에서는 숲의 파괴로 인한 심각한 경제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특정 지역의 벌채를 금하는 정책에만 의존했을 뿐, 백성 스스로 숲을 조성하도록 만드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었다.

숲이 살아야 한다


1971년 우리나라의 임목축적량은 11㎥에 불과하여 1910년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가뭄과 홍수가 연례행사처럼 찾아들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산림녹화(山林綠化) 사업을 적극 추진한 이후, 2010년에는 평균 125.6㎥에 달할 만큼 숲이 되살아났다. 독일과 일본의 그것에는 못 미쳐도 미국 수준에는 도달한 셈이다.


하지만 숲은 언제든 인간의 욕심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그리고 숲 파괴의 결과는 언제나 참혹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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